1960년대 포크 음악인들과 등장 배경
먼저 우디 거스리부터 조금 보려고 하는데요. 우디 거스리는 '전통 포크'를 '모던 포크'로 다듬은 아메리칸 포크'의 아버지로 통합니다. 그는 평생 미국 전역을 방랑하면서 포크 음악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수많은 창작곡을 남겼습니다. 1941년에는 또 다른 포크뮤직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셔 함께 Almanac Simgers를 결성하고요. 또 반파시즘, 평화운동, 노동조합이나 진보 좌파를 위한 정치적 저항이나 행동주의를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두 뮤지션으로 인해 모던 포크는 구전 민요가 아닌 작가가 있는 근대적인 음악으로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보수적이고 자조적인 가사를 표명한 컨트리와는 달리 이들이 만든 모던 포크 가사의 메시지도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초 이들, 급진적 포크 뮤지션들은 정부 기관의 조사를 받으면서 공식적인 음악 활동을 잠깐 중단한 적도 있었는데요. 그러다가 1950년대 말에 피트 시거가 결성한 킹스턴 트리오,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메리가 등장하면서부터 포크송 리바이벌이 시작되게 됩니다.
1960년대 포크 운동의 특징
1960년대 초 포크 운동은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과 흑인 민권운동 등의 정치적 운동과 결합했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포크 뮤지션들인 밥 딜런이라든가 필 옥스, 주디 콜린스 같은 사람들은 바로 이 운동의 전위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주도하는 동부의 포크 공동체는 주류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급진적 지식인들을 결집시켰고요. 또 정기적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포크 운동을 확대해갔습니다. 뉴포트는 뉴욕에서 동부 해안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한 3시간 정도를 북동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항구도시인데요. 59년부터 매년 이 뉴포트에서 포크 뮤직 축제가 벌어진다는 점에서 본다면 뉴포트는 포크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59년에 제1회 뉴포트 포크 뮤직의 영웅은 바로 존 바에즈였습니다. 당시 존 바에즈는 공식 무대에 오르지 못한 신인이었지만 절제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관객들의 찬사를 받게 되면서 60년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공연도 하고 또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서고 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는 직접 반전 시위에 가담해서 체포를 당하기도 했는데요. 1968년 반전 운동가인 데이비드 해리스와 결혼한 존 바에즈는 해리스가 비폭력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 거부로 투옥되면서부터 우드스톡 축제에 참여하는 등 반전 운동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1959년, 존 바에즈가 포크 여왕으로 등극했을 때 당시 밥 딜런은 미네소타대학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우연히 친구 때문에 알게 된 포크의 아버지 우디 거스리의 음악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50년대 중반에 10대였던 밥 딜런은 그 시대의 청소년들이 그랬듯이 로큰롤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1950년대 중반 밥 딜런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훨씬 시끄러운 음악인 로큰롤을 좋아하게 됐는데요. 또 당시에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에도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연기한 짐 스타크를 좋아했다고도 합니다. 또 당시에 최고 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도 매료되었고요. 또 TV에서 리틀 리처드를 발견한 순간에는 즉시 그 가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고 합니다. 피아노를 연주하기보다는 때려 부수면서 열창하는 그런 리처드의 노래 스타일을 집에서 피아노를 흉내내기도 하고요. 또 헤어스타일도 리처드처럼 머리 꼭대기를 잔뜩 부풀려 오르게 하는 화려한 스타일로 바꾸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밥 딜런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멀죠. 그 무렵 고향인 미네소타를 벗어나 뉴욕으로 건너간 밥 딜런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도 아주 유명했던 라이브 하우스 '거 디스 포크 시티'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1961년 해에는 뉴욕타임즈지에 포크 시티에서의 밥 딜런의 무대를 보고 절찬하는 평론가 로버트 셸턴의 평이 게재됐는데요. 그의 평은 이렇습니다. “'거 디스 포크 시티'에 포크 음악에 새 얼굴이 출현했다. 겨우 스무 살이지만 밥 딜런은 요 몇 달 새 맨해튼 카바레에서 연주한 스타일리스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다. ” “합창단 소년과 비트닉 사이의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밥 딜런은 천사 같은 얼굴과 허클베리 핀의 검은 코듀로이 모자로 일부 가려진 대걸레 같은 더벅머리를 지녔다. ” “그의 옷은 어쩌면 재단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기타나 하모니카, 피아노를 연주하고 새로운 곡들은 기억도 못 할 만큼 빨리 작곡하는 그가 터질 듯한 재능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밥 딜런의 목소리는 예쁜 것과 정반대다. ” “그는 뒤편 현관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사색에 빠져 있는 남부 노동자의 거친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포착하려 한다. ” “모든 외피와 내피들이 그의 음표 위에 남아 있었고, 그의 노래에는 타는 듯한 강렬함이 배어 있다. “ 이런 평론을 들은 밥 딜런은 포크계의 새 얼굴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밥 딜런은 콜롬비아 레코드와 정식 계약도 맺게 됩니다. 그 무렵 밥 딜런은 미시시피주의 흑인 청년, 에멧 루이스 틸 살인 사건을 제재로 한 The death of Emmet Till, 클랜시 브라더스의 멜로디 가사를 12 소절까지 단 렘 블링 겜블링 윌리, 냉전 체제에 대한 강박관념을 노래로 만든 Let Me Die in my Footsteps, 이런 곡들을 만든 이후에 자신의 자작곡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1962년에 발표한 Blowin in the wind는 밥 딜런의 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요. 한국에서도 아주 잘 알려져 있는 곡이죠. 뿐만 아니라 Freewheelin 음반의 성공으로 딜런은 세대의 대변인이라는 별명을 갖게 한 동시에 이 앨범은 60년대 반정 운동의 송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적인 가사, 강렬하고 임팩트 있는 보컬 톤, 곡조와 박자를 무시하는 무심한 창법 등으로 포크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면서 대중음악 전반에 깊은 영향력을 확대해갔습니다. 1963년에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 포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존 바에스와 공연을 하게 되죠. 1960년대가 프로테스트 포크를 소환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1960년대 프로테스트 포크 등장 배경 - 짐 크로우 법
1960년은 미국 역사상 최연소로 당선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한 해였습니다. 1960년 11월 9일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제치고 당선된 케네디는 민주주의의 건전한 기초를 이루는 자유와 평등이 미국의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유명한 '뉴프런티어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죠. 당시는 짐 크로우 법에 따라서 흑인과 백인의 분리 차별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 분리를 골자로 한 법인데요. 법의 명칭인 짐 크로우라는 말은 1830년대 미국의 코미디 뮤지컬에서 백인 배우가 연기해서 유명해진 바보 흑인 캐릭터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짐 크로우는 흑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짐 크로우 법은 옛날 미국 남부 연맹에 있는 모든 공공 기관에서 합법적으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미국의 흑인들이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는 사회적 지위를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 짐 크로 법에 따라서 흑인들은 식당이나 화장실, 극장, 버스 등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분리되어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공립학교라든가 공공장소, 이런 대중교통에서 인종을 분리했고요. 화장실이라든가 식당, 식수대에서조차 백인과 흑인을 격리시켰습니다. 남북 전쟁과 흑인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후로도 80년 넘게 시행되었던 이 짐 크로우 법은 1954년 5월 17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불평등한 인종 분리 교육은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일대 전환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5년 미국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좌석을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 움직임이 촉발되었죠.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로자 파크스는 전미 흑인 지위 향상협회에 도움을 청했고 이로써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인물 3만 5천 장이 몽고메리 전역에 배포되었고요. 이들의 요구사항은 버스에서 흑인이 평등하게 존중받을 것, 그리고 흑인 운전기사를 고용할 것, 먼저 탄 순서대로 버스 중간 좌석에 앉을 수 있게 할 것 등의 내용을 제시했습니다. 흑인 교회들이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죠. 흑인들은 출퇴근할 때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고요. 그 결과 대부분의 버스가 텅 빈 채로 운행되었습니다. 로자 파커스 사건 이후에 이러한 흑인 민권 운동이 점점 격화되면서 버스에서의 흑백 좌석 분리제가 폐지됐고요. 또 이때부터 짐 크로우 법은 사실상 효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1964년 인종, 민족, 국가, 여성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민권법이 제정되었고요. 그 이듬해에 투표권법이 제정되면서 짐 크로우 법은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당시 비폭력주의에 의거한 흑인 인권 운동을 선도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I have a dream, 이라는 유명한 연설도 있었고요. 또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을 주장했던 흑인 해방 운동의 급진파 지도자인 말콤 엑스 같은 사람들도 있었듯이 당시 흑인들은 인권을 찾기 위한 운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해 갔습니다. 2017년에 개봉된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초 미 항공 우주국 나사에서 큰 공을 세웠던 흑인 여성들의 일화를 그리면서 당시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19년에 개봉된 영화 그린 북에서도 1960년대 초 이탈리아계 백인 이민자와 흑인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부당한 인종 차별 주의를 잘 그려낸 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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