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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음악, 펑크 음악, 미국 음악 역사, 대중 음악 역사

한국에서의 포크 음악 역사

한국에서의 포크 음악 역사

한국에서의 포크 음악 역사
한국에서의 포크 음악 역사

이렇게 청년들의 의식혁명을 동반한 60, 70년대의 포크 운동은 이미지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 트로트 열풍이 한창이었던 한국 청년들의 감성을 강타했습니다. 값비싼 악기와 장비가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노랫말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포크송은 청바지나 생맥주와 함께 통기타 음악으로도 불리면서 삽시간에 한국 청년문화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되었습니다.

한대수의 포크음악 등장

1968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비틀스의 로큰롤을 듣고 히피들과 어울려 지냈던 한대수가 귀국했는데요. 그의 포크 뮤직은 지금까지 한국에 존재해왔던 그 어떤 문화와도 완전히 다른 감수성을 보여주면서 청년들을 매혹했습니다. 1968년에 장발을 휘날리면서 미국에서 건너온 한대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동안 번안곡 중심의 통기타 가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한국 가요 신에서 최초의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의 히피 또는 한국의 밥 딜런, 한국의 존 레넌으로 불린 한대수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을 고백한 적이 있었던 양희은의 그것은 한국 사회가 갖는 충격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1960년대 말 한국은 미국의 히피문화를 수용할 만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지는 못했지만 70년대 들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와 같은 청년 패션이 변화를 겪고 또 청바지와 통기타 등 포크 뮤지션들이 지향했던 문화들이 급격히 청년세대들에 파고들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봐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한대수의 1집 앨범의 커버 사진과 그 수록곡 '물 좀 주소'라는 곡은요. 한대수가 한국 대중음악계에 데뷔하자마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74년에 발매한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 이 앨범에 수록된 '물 좀 주소'라는 곡은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며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요. 또 이듬해에 발매한 2집 '고무신'에 수록된 전곡이 국가의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전량 회수되기도 했습니다. 이 한대수의 앨범들은 한국에서 모던 록, 모던 포크 장르를 개척한 앨범으로 지금은 평가받고 있는데요. 70년대 한국은 진보적인 청년 대중문화가 국가와 사회에 위협을 끼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모던 포크는 기성 사회의 관점에서는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청년문화였습니다. 많은 문화들이 그렇듯이 변화를 늦추려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가져오는 것은 언제나 청년들이었으며 기성 사회가 그것을 막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혁신적인 청년문화는 언제나 그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안착시켜 갔습니다. 바로 그런 데서 청년문화의 내적인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한대수의 앨범인 고무신 역시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베이스 들어오고 기타도 좀 울고 장구 때려”, 이런 가사들이 있는데요. 이렇게 곧바로 노래에 들어가서도 마치 랩을 하는 것처럼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노래가 진행됩니다. 이 곡은 전자기타와 드럼, 하모니카가 결합된 밥 딜런의 포크록을 연상시키는데요. 이런 곡들만 들어봐도 한대수가 한국 포크록의 대부라는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진행을 당시 대중음악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트로트와 비교해 본다면 당시에 한대수의 노래가 얼마나 이질적으로 보였을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김민기의 포크 음악

71년에는 김민기의 1집 독집 앨범이 발표됐었는데요. 이 앨범 역시 한국 포크음악 대부의 첫 등장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친구, 아침이슬과 같은 창작곡 외에도 외국곡에 직접 가사를 붙인 '저 부는 바람'이 실려 있는데요. 한국 대중음악사의 대표적인 명반이자 한국 포크 음악의 기원으로도 꼽히는 것이 바로 김민기의 1집입니다. 김민기의 유일한 정규앨범이기도 한 이 음반은 그때까지 발표되었던 포크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1950~60년대에 영미권에서 유행했던 팝 음악이라든가 사랑 타령의 트로트 일색이었던 한국 대중가요계에 기성의 권위를 조용히 비난하고 풍자하는 분위기와 지적이고 시를 읊는 듯한 분위기의 가사를 통해서 대중가요의 소재를 확대하고 포크 세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한국적인 소박한 정서와 서정적이고 정직한 언어로 표현된 한대수와 김민기의 포크는 시적 감수성을 향유할 수 있는 문학성은 물론 감미로운 선율과 합창으로 이어지기 쉬운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민기가 1집을 내놓았던 1971년 한국 대중음악계 최고의 스타는 당시 20대 아이돌이었던 남진과 나훈아였습니다. 나훈아는 정통 트로트의 맥을 계승해가는 실력 있는 인기 스타였고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 류의 로큰롤로 엄청난 청년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는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포크 뮤지션들이 외국의 팝송을 한국어로 번안한 아름다운 음악을 내놓고 있었죠. 이런 분위기로 볼 때 김민기와 한대수의 포크는 당시의 대중음악계에서도 매우 색다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김민기 1집은 한국 포크 음악과 대중음악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당시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꼽히는데요.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정점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는 이 음반은 1970년대 후반 대학교의 노래패와 1980년대 노래운동을 비롯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저류를 타고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본격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김민기의 앨범은 지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고뇌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완성도 높은 음악을 담아냈습니다.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다녔던 1969년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김민기의 자작곡인 '친구'는 1집 음반에 김민기의 목소리가 담긴 첫 곡이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곡은 는 그가 고3 때였던 68년, 친구 동생의 사고사 소식을 듣고 만든 노래였다고 하는데요. 혼자만 간직하고 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불렀는데 그때 팝송만이 최고의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청년들에게 어떤 음악적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초창기 한국의 포크 씬은 영미권의 팝을 우리말로 번안한 곡이 대세였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노랫말에 담는 의미로서의 포크음악이 무엇인지를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해 줬던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한국 포크의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풍경은 이러했습니다. 또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아침 이슬>은 발표되자마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큰 화제를 모으면서 어두운 시대상과 맞물리고 또 대학가의 술집뿐만 아니라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널리 애창되었던 곡이기도 하죠. <아침 이슬>, <상록수>는 정치적인 의도로 만든 노래가 아니었는데 1970~80년대에는 시위 현장의 주요 레퍼토리였고 21세기에는 국민적인 애창곡이 되기도 했죠. 이런 미스터리 한 이유로 인해서 김민기는 1970년대 저항의 아이콘이자 민중가요의 대부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김민기의 포크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만큼 호소력이 짙었다는 의미겠죠. 그러나 한국 포크음악의 절정기는 포크 운동의 몰락기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